예수성심 천주교 커네티컷 성당
Sacred Heart of Jesus Korean Catholic Parish

교회사

테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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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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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1141

<교회창설의 배경>

근세초기의 지리상의 큰 발견과 이에 따른 세계적인 탐험여행은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을 초래하였고, 서세동점은 동시에 서학(西學)이 동점하는 계기가 되어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에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의 예수회는 스페인 예수회원 세스페데스(G. de Cespedes) 신부를 조선 남해안에 파견하여 일본인 천주교 장병들의 신앙을 돌보게 하였다. 물론 그는 토착인 즉 조선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민과의 적대관계로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일본으로 끌려간 납치자들 중 많은 이가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그들의 개종은 일본 예수회원들에게 조선전도의 희망과 관심을 일으켜 조선전도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도들은 모두 좌절되었다.
한편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도 북경에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 조선전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북경을 방문하는 조선 사신들은 서양문물에 대해 새 지식을 얻고자 선교사들을 자주 찾았고, 선교사들 역시 그들을 기꺼이 맞이하고, 그들과 서양의 학문과 종교에 대해 필담을 나누었다. 이리하여 조선 사신들을 통해 서양문물이 처음으로 조선에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예수회원들은 조선전도의 계획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특히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친교를 맺었던 아담 샬(Adam Schall, 揚若望)은 소현세자를 통해 조선전도를 시도하려 하였으나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좌절되었다. 중국으로부터의 조선전도의 시도 역시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중국의 선교사들이 한자로 저술한 천주교 관계 서적들만은 17세기 초엽부터 계속 조선에 도입될 수 있었다. 이렇게 도입된 서적들은 특히 남인(南人)학자들에게 환영되고 연구됨으로써 실학운동에 자극을 주는 동시에 서학이란 새롱운 학풍을 낳게하였다. 《천주 실의》(天主實義)는 이미 간단하게나마 이수광(李 光)에 의해 소개되었고, 그와 동시대인인 유몽인(柳夢寅)은 서학의 천주(天主) 와 유교의 상제(上帝)를 동일시함으로써 《천주실의》에 대해 보유론적(補儒論的)인 논평을 가하였다. 이익(李瀷) 역시 《천주실의 발문(跋文)》에서 비슷한 논평을 하였다. 이익은 또한 《칠극》(七克)에 대해서도 보유론적인 논평을 하였다. 이익의 제자들 중에서는 학문적인 관심을 넘어서 서학에서 인생의 진리를 발견하고 신앙을 실천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홍유한(洪儒漢)은 처음으로 천주교 계명을 실천에 옮겼는데 그 때가 1770년경이었다. 이어 권철신(權哲身), 정약전(丁若銓), 이벽(李檗) 등에게서 천주교 신앙이 싹트게 되었는데, 주어사(走魚寺)에서의 강학(講學)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인생의 중요문제에 대해 유교의 경전에서 그 해결을 보지 못하자 서학서에서 그 해결을 찾아보고, 이어 기도와 재계 등으로 천주교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벽 외에는 모두 계속하지 못하였고, 이벽 또한 천주교 서적의 부족으로 천주교 지릴를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교회의 창설과 조선교구의 설정>

천주교는 마침내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와 이벽, 정약전 등과 더불어 신앙 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정식으로 수용되었다. 이벽은 그의 친구 이승훈이 동지사(冬至使) 편에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북경에서 선교사를 방문하고, 영세를 청하고 또한 많은 성서와 성물을 갖고 돌아오도록 간곡히 권고하였다. 과연 이승흔은 북경에 이르러 북당(北堂)의 그라몽(de Grammont, 梁棟材) 신부로부터 필요한 교리를 배우고 베드로란 본명으로 영세 하였고 또한 많은 성서와 성물을 갖고 1784년 봄에 귀국하였다. 이승훈은 귀국하자 이벽과 더불어 교리를 연구하고, 그것을 친척 과 친지들에게 전도하였으며 그해 9월(음)부터는 영세를 주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세례를 받은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가 탄생하였다.
이벽은 또한 정약전과 정약용 (丁若鏞) 형제를 찾아가 복음전파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중인(中人) 계급에 전교하여 김범우(金範禹), 최인길(崔仁吉), 최창현 (崔昌賢), 지황(池璜) 등을 입교시켰다. 또한 학문과 명성이 높은 이들의 개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양근(楊根)의 권씨 일가를 찾아가 전도하였고 그 결과 권철신과 권일신(權日身) 형제를 개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권일 신은 개종과 더불어 복음전파의 열렬한 사도가 됨으로써 이승훈, 이벽과 함께 신생교회의 삼대지주(三大支柱)가 되었다. 그는 제자인 충청도 출신의 이존창(李存昌)과 전라도 출신의 유항검(柳恒儉)을 입교시킴으로써 복음을 멀리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까지 전파시 켰다.
이들 교회지도자들은 1786년에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실천하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물론 불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지와 선의에서 미사를 드리고, 고해성사, 견진성사 등을 집전하였던 것이다. 당시 교회의 영수격이었던 이승훈이 먼저 신부(神父)로 선출되었고 이어 그는 또 다른 10명을 신부로 임명하여 성사를 집전하게 하였다. 가성직제도는 약 2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가성직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에 관하여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문의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북경의 선교사들은 성직자의 영입을 권고하였다. 이에 그들은 다시 밀사를 파견하여 구베아(de Giuvea, 揚士選) 북경주교로부터 선교사 파견의 약속을 받을 수 있었고 그 결과 1794년말 중국인 주문모 (周文謨) 신부가 조선교회에 파견되었다. 주신부의 노력과 신도들의 열렬한 전교활동에 힘입어 조선교회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으니 그의 입국 당시 4,000명에 불과하던 신자가 1800년에는 1만명으로 늘어났다. 신도들은 특히 명도회(明道會)란 신심단체를 조직하여 서로 교리를 익히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노력하였다. 명도회의 초대 회장은 정약종(丁若種)이었다. 그는 신도들을 가르치기 위해 《주교요지》란 순 한글로 된 교리서를 손수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01년의 대박해는 교회를 거의 폐허화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순교를 위시하여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도 거의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박해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던 신자들이 점차 새로운 신도집단을 형성하면서 무엇보다도 성직자 영입운동을 서두르게 되었다. 교회 재건에 힘쓴 당시의 신자 중에는 정하상(丁夏祥), 신태보(申太甫) 등이 있었고 그 후 새로 개종한 유진길(劉進吉)과 조신철(趙信喆) 등이 이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수시로 북경을 내왕하고 또는 밀사를 파견하여 북경주교에게 선교사의 파견과 그 지속적인 보장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북경주교에게는 물론이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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